[환경포커스=국회] 하수처리시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오랫동안 하수처리장은 생활하수와 오수를 처리하는 전형적인 환경기초시설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공간이 단순한 ‘처리’의 현장을 넘어, 지역사회의 위험 징후를 가장 먼저 포착하는 공중보건 인프라로 주목받고 있다.
감염병의 확산, 마약류 오남용, 항생제 내성 증가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위험이 하수 속 데이터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가 발표한 「하수처리시설은 ‘환경시설’인가 ‘공중보건 인프라’인가: 하수 기반 감시(WES)체계 법제화 방안」 보고서는 이러한 변화의 필요성을 정책적으로 짚고 있다.
하수 기반 감시, 즉 WES(Wastewater-based Epidemiology)는 기존의 임상 중심 감시체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병원에서 확진자가 확인된 이후 대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이상 징후를 사전에 감지하는 구조다. 하수에는 지역 주민 전체의 건강 상태와 생활 패턴이 집약돼 있어 감염병이나 약물 사용 변화가 빠르게 반영된다.
특히 하수 데이터는 임상 진단보다 1~2주 빠르게 이상 신호를 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감염병 대응에서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단순한 환경 모니터링을 넘어 국가 조기경보체계의 핵심 인프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미 해외에서는 제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2024년 하수처리지침 개정을 통해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에서 감염병 병원체와 항생제 내성 지표를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도록 의무화했다. 미국 역시 CDC를 중심으로 국가 하수감시체계를 구축해 코로나19를 넘어 다양한 감염병으로 감시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일부 제도적 기반은 마련돼 있지만 통합적인 체계는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질병관리청은 전국 114개 하수처리시설을 대상으로 한국형 하수 기반 감시체계(KOWAS)를 운영하고 있으나, 관련 법과 제도가 분절적으로 존재해 국가 감시체계로서의 기능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현행 「감염병예방법」은 임상 감시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하수와 같은 환경매체 기반 감시를 독립적으로 규율하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반면 「마약류관리법」은 하수 기반 조사를 일부 반영하고 있어 제도 간 불균형도 존재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이러한 한계를 개선하기 위해 △하수도법 개정을 통한 공중보건 기능 명확화 △감염병예방법에 환경매체 감시 근거 반영 △마약류관리법과의 연계 강화 △보건환경연구원 역할 정립 △중장기 특별법 제정 검토 등 5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하수처리시설을 단순한 처리시설이 아니라 감염병과 사회적 위험을 감지하는 기반시설로 규정하고, 시료 채취와 정보 공유, 기관 간 협력 체계를 법적으로 명확히 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와 함께 재채취 기준, 확인검사 절차, 지자체 통보 방식, 대국민 위험소통 등 세부 운영 기준을 마련해야 실질적인 감시체계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됐다.
결국 이번 제안은 하수처리시설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 작업이다. 지금까지 하수처리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 환경기초시설로 인식돼 왔지만, 앞으로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공중보건 인프라로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하수 속에 담긴 정보는 이미 우리 사회의 변화를 먼저 말해주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신호를 제도와 정책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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